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사로(師魯), 소자(小字)는 여숙(汝淑), 호는 이유당(怡愉堂). 충훈부경력(忠勳府經歷) 이언홍(李彦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무주현감 이소(李沼)이다. 아버지는 이도(李濤)이며, 어머니는 성주 이씨로 이석명(李碩明)의 딸이다. 현감 이준(李浚)에게 입양되었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6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1608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가 정자가 되었다가 저작·박사를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 때 장인 조수륜(趙守倫)과 함께 연루되어 이산으로 유배되었으며, 1618년에 창평으로 이배되었다가 1621년에 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등용되어 전적에 임명된 뒤 예조좌랑 겸 춘추관의 기주관과 지평(持平)을 지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공조정랑으로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어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1632년 부수찬으로서 왕세자 가례(嘉禮)를 잘 수행한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1634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강석기(姜碩期) 등과 인조의 사친(私親)인 원종(元宗)의 입묘(入廟) 논의에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연산에 귀양갔다가 1636년에 풀려나 승지가 되었다.
이듬 해 좌부승지로 관서 지방에 무재(武才) 시험관으로 갔다가 병자호란을 당해 부득이 돌아오지 못하고, 영북(嶺北)으로 가 여러 도에 격문을 보내고 격려하다가 이듬 해 돌아와 승지가 되었다. 그 뒤 이조·형조의 참의와 여러 차례의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호란 후 청나라의 갖은 횡포가 심해지자, 표면상으로 그들을 위문한다는 명목으로 적진에 들어가 정황을 살피고 돌아왔다. 1641년 한 때 강원감사로 나갔으며 이조참의로 있다가 죽었다.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청주의 국계사(菊溪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