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룡(元龍). 이응복(李應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동열(李東說)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이시욱(李時煜)이며, 어머니는 이행(李荇)의 후손이다.
태어나면서 총명이 절륜하여 글귀를 쓰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생진과에 합격하고, 1654년(효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기용되었다. 이어 홍문관저작·박사 등을 거치고 봉상시직장이 되었다. 1658년 예조좌랑을 지내고 이듬해 정언(正言)이 되었다. 1662년 헌납(獻納)을 거쳐 사간에 오르고, 1670년(현종 11) 지평(持平)을 지낸 뒤 장령(掌令)·집의(執義)를 차례로 거쳤다.
이어 직강을 지낸 뒤 사복시정·장악원정·세자시강원필선 등을 역임하였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 상에는 산릉의 감수를 맡아 책임을 완수하였으므로 병조참지에 승차하였다. 이어서 병조참의를 지내고 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 등을 지내면서 왕의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외직으로는 평안도사·고산찰방·개성경력 및 청풍·선산의 부사와 성주·양주·홍주의 목사 등을 지냈다. 평안도사로 있을 때 흉년이 들어 기민이 속출하자, 조정에서는 진구어사(賑救御史)를 별도로 차출하지 아니하고 기민구제사업을 도사에게 일임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백성들이 긴급구호의 혜택을 입어 아사를 최소화할 수 있었으므로 송시열(宋時烈)이 여러 번 공평정직하게 일을 잘한다고 칭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