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할아버지는 이정일(李廷一)이고, 아버지는 이종휘(李種徽)이다. 어머니는 최보흥(崔普興)의 딸이다.
1775년(영조 51)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이 해 예문관검열을 뽑기 위하여 왕이 친림한 특별시험에서 한영운(韓永運)·권빈(權儐) 등 세 사람이 뽑혔다.
이어 홍문관정자·저작·박사 등을 거쳐, 1782년(정조 6) 감찰이 되고, 이듬해에는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뽑혔으며, 1784년 홍문록에 오른 뒤 수찬이 되었다. 이어 교리가 되어서는 홍국영(洪國榮)과 권세를 같이하려는 무리들을 탄핵하였다.
1792년 부교리로 재직 중 박지원(朴趾源)의 저서 『열하일기』의 문체가 저속함을 상소하였고, 다시 남인 이가환(李家煥)을 서학교도라고 논척하여 충주목사로 좌천시키는 등 주자학적 전통에 입각하여 신학문의 배척에 앞장섰다. 1800년 대사간에 오르고, 그 뒤 대사헌·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