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지만(志曼).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다. 의영고봉사 이희년(李希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완릉군(完陵君) 이세량(李世良)이다. 아버지는 형조참의 이목(李莯)이고, 어머니는 증영의정 윤자신(尹自新)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박사(博士)에 뽑히고, 이듬 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형조낭청 겸 기사관(刑曹郎廳兼記事官)을 거쳐 예조좌랑·정언을 지냈다. 지평으로 있을 때 대사간 정온(鄭蘊)을 옹호하다가 체직되었다. 1636년에 부수찬을 거쳐 수찬으로 있을 때 척화를 적극 주장하다가 병자호란을 맞았다.
호란 후에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한때 관계를 떠났다. 1639년에 복직하여 헌납·교리·수찬 등의 청요직을 역임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다시 은거하였다. 1644년 교리가 되고 정랑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고, 이듬 해에 완원군(完原君)에 봉해졌다.
1647년 도승지가 되고 이어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청역(淸譯) 정명수(鄭命壽)의 종용으로 교체되어 대사간이 되었다. 1649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묵은 폐단을 시정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병졸을 훈련시키는 등 국방에 힘썼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듬 해인 1650년(효종 1)에는 대사헌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경상감사로 있을 때 표류해 온 중국배가 있어 조정에서 이를 청나라로 압송했다. 이 때 그 주문(奏文)에 왜정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남방의 성곽 수축과 군사 훈련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 이에 청나라는 이것이 병자호란의 강화조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사신을 보내어 추궁했다. 당시의 동래부사였던 조경(趙絅)과 영의정이었던 이경석(李景奭) 등이 책임을 졌고, 이만도 영변으로 귀양 갔다.
곧 풀려나 이듬 해에는 황해도관찰사·강화유수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이만이 전라도관찰사로 재직 시 완도의 국금지(國禁地: 나라에서 건물 설치를 금지한 땅)에 건물을 설치해 치부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현종이 즉위하자 공조참판으로 복귀했다. 1661년(현종 2) 충공도관찰사로 나가 부모의 묘를 개장(改葬)하면서 민가를 철거하고 훼손했다는 오해로 파직되었다. 우의정 원두표(元斗杓)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1662년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한성부우윤이 되었으나, 일행 중 금물도매자(禁物盜買者)가 있다는 탄핵을 받아 정사 정유성(鄭維城)의 강력한 추천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아산의 시골집에서 죽었다. 이만은 지방관으로 오래 있는 동안 농사짓는 방법 및 토질을 잘 가려내는 일 등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나 너무 인색하고 이재(理財)에 밝아 당시 사람들이 싫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