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정이(挺而), 호는 송사(松沙). 할아버지는 완창부원군(完昌府院君) 이성중(李誠中)이고, 아버지는 완흥군(完興君) 이유징(李幼澄)이며, 어머니는 예문관검열 조확(趙擴)의 딸이다.
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훈도를 받았다. 성품이 굳세고 절개가 있었으며, 여러 서책을 널리 읽고,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겼다.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가두는 등 인륜에 어긋나는 일을 하자 개탄하면서, 숨어서 밭을 갈아 어머니를 봉양하며 지냈다. 1626년(인조 4)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나가 동궁세마(東宮洗馬)가 되고, 시직(侍直)으로 옮겼다.
이 해 9월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정언을 거쳐 고성현령으로 나갔다가 수찬·지제교·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등을 역임하였다. 1631년에는 평안도순찰사로 나가 성첩(城堞)을 수축하고, 군량을 저장해 방비를 튼튼히 하고 돌아와, 국경 지대의 정형을 자세히 보고해 국방 대책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듬 해 인조의 사친(私親)인 원종(元宗)의 추숭(追崇)을 반대해 삭직되었다가, 다시 수찬으로 기용되어 헌납(獻納)·이조정랑·무장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지평으로 대청강경책(對淸强硬策)을 진언하고, 그 해 겨울에 호란이 일어나자 사간으로 남한산성에 호종(扈從), 성 밑 마을의 양곡을 실어들여 전수책(戰守策)을 확립하고 주화인(主和人)들을 베어 군심을 격려하도록 계청(啓請)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뒤에는 자청해 세자를 따라 청나라로 가서 보좌, 주선한 공이 컸다. 돌아와서 대사간·부제학·경상도관찰사·예조참의를 지내고, 홍주목사로 나가 임지에서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완양군(完陽君)에 추봉(追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