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경휴(景休). 증조는 이중련(李重連)이고, 할아버지는 이적(李適)이다. 아버지는 사직 이서건(李瑞建)이다.
1522년(중종 17) 진사시에 합격하고 1536년 별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정언(正言)·장령(掌令) 등을 거쳐, 1548년(명종 3) 사성으로 함경도어사로 나가 흉년에 대한 구황(救荒) 실태를 살폈다.
그 뒤 교리·사간 등을 지내고, 1550년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중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해 사간으로 있으면서 소윤(小尹) 일파인 이기(李芑) 등의 사주를 받아, 구수담(具壽聃)·허자(許磁)·송순(宋純)·이준경(李浚慶) 등이 을사사화 때의 유배자들을 비호한다고 탄핵해 이들을 유배시켰다.
또 이기·이홍남(李洪男)의 사주를 받아 이치(李致)·이해(李瀣)·최창손(崔昌孫) 등을 무고해 장사(杖死)하게 하였다. 이듬해 평안도어사로 다녀와서 직제학이 되었다가 예천의 문서 부정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60년 진복창(陳復昌)이 제거되자, 허자·송순·이준경 등을 모함한 사실이 탄로나 함경도 경원에 귀양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소인배들과 결탁해 많은 옥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세상의 지탄을 받았다. 일찍이 함경도어사로 있을 때 을사사화로 유배된 사람들을 적발해 죄를 주었는데, 경원으로 귀양가게 되자 수령들이 “이 사람이 전에 적객(謫客)을 돌보아준 것을 죄로 다스렸다.”고 하며 멀리해 더욱 곤고하게 지냈다.
그러나 전일에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던 이준경이 순변사(巡邊使)로 나가 이무강에게 식물을 보내주어 감읍(感泣: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탄함.)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