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이립(而立), 호는 청은(淸隱). 이공려(李公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사필(李士弼)이다. 아버지는 사재감정 이우인(李友仁)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로 허경(許坰)의 딸이다.
1588년(선조 21)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봉교를 거쳐 1592년 예조좌랑·병조좌랑·사간원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정언으로 재임할 때 시폐의 개선책을 올렸다.
즉, 공도(公道)를 회복해 치화(治化)를 새로이 할 것, 인심을 수습해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할 것, 기강을 세워 체통을 존중할 것, 상벌을 밝혀 사기를 고무할 것, 검약을 숭상하고 공덕(公德)을 밝힐 것, 수령을 선임해 민생을 소생시킬 것을 상주하자 선조가 가상히 여겨 품계를 올려주었다.
1594년 함경도순안어사(咸鏡道巡按御史)가 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왔는데, 번호(蕃胡)와 민간의 병폐를 상세히 복명하고 육진(六鎭) 중 한 곳에 유능한 인물을 특파해 중요한 임무를 맡길 것과 경흥부를 아오지로 옮길 것을 아뢰었다.
1599년 명나라에서 보내오는 군량미가 수송 중에 부패해 먹을 수 없다는 명나라의 불평이 심해지자, 수송을 독려해 원성을 진정시켰다.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을 도와 좋은 치적을 올리던 중 홍문관응교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 승정원부승지·우승지를 거쳐 1603년 성균관대사성, 이 해 대사간, 이어 상호군을 역임하였다.
1605년 동지사 겸 주청사(冬至使兼奏請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가서 다년간 문제가 되었던 염초(焰硝: 화약)의 수입을 허락받았다. 1606년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이듬 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을 때에는 3년 전부터 허가한 대마도와의 교역에서 야기되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잘 조치해 치적을 올렸다. 1608년 한성부좌윤·예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