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덕 출신. 1919년 3월 19일 병곡면·창수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그 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8일 부근의 영해면 성내동 장날을 이용하여 2,000여명이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것에 자극을 받아, 이현우(李鉉祐)·권재형(權在衡)·이현설(李鉉卨)과 함께 고향인 창수동 경찰주재소 근방에서 3월 19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계획된 날에 창수 경찰주재소 앞에 200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였는데, 이때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또, 앞장서서 주재소로 진격하여 투석과 몽둥이로 사무실·객사·주임순사의 집 등을 파괴하고, 주재소의 공문서를 파기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검거되어 4년의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