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황주 출신.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전덕기(全德基)가 목사로 있는 상동교회(尙洞敎會)에 가서 을사조약파기를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 이준(李儁)이 지은 상소문을 최재학(崔在學)을 우두머리로 하여 제출하였다.
그 뒤 대한문(大漢門) 앞과 종로에서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가두연설을 하는 등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전덕기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 황해도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창건사업을 추진할 때 김도희(金道熙)의 연락을 받고 황해도의 군자금모집과 단체이주민모집을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다.
1910년 12월 안명근(安明根)의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모집사건이 일어나자 일제가 이를 기화로 황해도의 신민회회원들과 독립군기지창건사업의 추진자들을 체포할 때, 1911년 1월 다른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7년간 복역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1920년 임시정부 황해도 재령선전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21년 7월 이형순(李亨淳)·김덕영(金德永)·김기형(金基瀅)·김호익(金浩益)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임시군사주비단(臨時軍事籌備團)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 임시정부에 보내었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부문과 선전문들을 국내에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