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노동쟁의를 지도하던 조선인 지도자 강유홍(康有鴻)·구순암(具順岩)·정순옥(鄭順玉)이 이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1932년 4월 이와태현 소재 국철작업장에서 자유노동자들이 쟁의를 일으키고자 하자 전국일본노동자협의회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본부 상임위원회는 본부위원의 한사람인 강유홍을 비롯한 2명을 현지에 파견했다.
당시 이 작업장에는 조선인 노동자 60명과 일본인 노동자 100여 명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본부 위원 강유홍은 4월 26일, 60여 명의 쟁의원으로 쟁의위원회를 결성하고 요구 조건을 정리한 후 쟁의 준비를 마쳤다.
28일 오전 7시경 ‘작업시간을 10시간으로 할 것’ 등 총 8개 조항을 내걸고 쟁의에 돌입했다. 9인의 교섭위원의 교섭 결과 요구 사항이 모두 받아들여져 계약서가 조인되었다. 요구 조건이 받아들여지자 쟁의위원회는 쟁의를 총괄하고 이후 운동방향에 대해 협의를 했다.
그러나 요구 조건을 수락한 청부업자 아이다쿠미(有田組)는 계약서대로 이행하지 않기 위해서 쟁의를 주도한 조선인노동자들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폭력단 100여 명을 조직하는 한편, 경찰과 소방대와 함께 습격을 준비했다.
5월 4일, 오후 5시, 시작된 제1차 습격으로 쟁의의 후속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현지에 남아 있던 강유홍이 부상을 당하고 주재소와 병원으로 갔으나 경찰과 의사는 모두 수사와 치료를 거절했다.
저녁 8시반부터 시작된 제2차 습격에서 다이나마이트·곡괭이·끌 등 흉기를 들고 습격한 일본인들은 붕대를 싸매고 있던 강유홍에게 다시 일격을 가해 살해하였다.
그리고 구순암을 뽕나무밭에 끌고 가 살해했으며 정순옥을 방에서 끌어내어 구타했다. 정순옥은 집밖으로 도주하다가 즉사했다. 이외에도 김호(金虎)가 중상을 당한 것을 비롯해 조선인 3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러한 사태가 전개되는 동안에도 일본관헌은 진압하지 않고 도리어 ‘조선인 150명 내습’ 등의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조선인노동자를 구속했다.
5월 8일, 이 소식을 들은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본부는 긴급위원회를 열어 ‘이와테사건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9일에는 특파원 4명을 현지에 파견했다. 이외에 해방운동희생자구원회변호사단도 후속책 마련에 들어갔다.
해방운동희생자구원회변호사단의 협조를 얻은 끝에 폭력단 가운데 53명이 살인죄·소요죄·상해죄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대책위원회는 6월 3일 부상자에 대한 위문금 3천원과 조합비용 1천원 등 4천원을 청부업자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 사망자에 대한 위자료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청부업자 아이다쿠미(有田組)는 경찰을 통해 유족들에게 500원의 위자료를 전달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족의 거주를 알지 못해 실제로 위자료의 전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3인의 시체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판검사의 입회 아래 5월 6일 해부된 후 8일 오후 2시 가매장되었다. 이들에 대한 추도식은 6월 8일 가매장지에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