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4년(선조 17) 북방의 권관(權管)에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정철(鄭澈)의 명령으로 구례현감으로서 운봉현감 남간(南侃)과 함께 전라좌도의 관병 5,000여 명을 거느리고, 영남의병장 정인홍(鄭仁弘), 호남의병장 최경회(崔慶會) 등과 성주를 협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구례는 왜적이 영남으로부터 양호(兩湖)로 들어가는 요충지이므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에 의하여 조방장(助防將)에 임명되어 지켰다. 그러나 1597년 왜적이 다시 침범하여 남원성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붓자, 구례현감으로 남원성을 지키다가 전사하였다.
이 후 관직이 미천하고 자식이 없었던 관계로 전공포상에서 빠졌다가 1651년(효종 2) 진사 김지명(金之鳴)의 상소로 포상을 받게 되었다. 정유왜란 때 함께 전사한 정기원(鄭期遠)·이복남(李福男)·임현(任鉉)·김경로(金敬老)·신호(申灝)·이덕회(李德恢) 등과 함께 7충신(忠臣)이라고도 하였다.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남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