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징원(澄源). 희안군 이집(李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금천군 이감(李瑊)이다. 아버지는 완창부원군 이성중(李誠中)이며, 어머니는 의빈부경력 조수(趙琇)의 딸이다.
1583년(선조 16)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검열에 서임되었다. 1588년 사신을 수행해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사축서(司畜署)를 거쳐 병조좌랑·지제교·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홍문관수찬을 역임하고, 1591년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하였다.
그 해 이조좌랑, 다시 승문원교리가 되었을 때 순무사에 임명되어 북방의 형편을 살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체찰사 최흥원(崔興源)의 종사관으로 황해도 지방에 파견되었다. 서울이 위태롭다는 급보를 듣고 달려와 선조를 서울 근교 사현(沙峴)에서 만나, 그 뒤 의주까지 호종해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어머니와 결별하고 선조를 모셨는데 어머니가 지름길로 의주까지 와 상봉했으니 충효를 겸전하였다. 그 해 이조정랑으로 중직대부(中直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왜적을 피해 북상하던 중 광해군이 함경도로 가게 되었을 때 수천의 백관과 위졸(衛卒)의 대오를 편성해 혼란 없이 가게 하였다. 선조가 의주에 머물러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때 이항복(李恒福) 막하에서 계책을 세워 평양 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 1593년 의주목사 겸 병마절제사가 되어 장졸을 통어하는 한편, 장정 3인 이상을 가진 사람에게 2인을 취업하게 하니 민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그러나 과로로 죽었다.
성품이 강직해 중상하는 자가 많았으나, 선조가 항상 좌우에 두면서 대소사를 자문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