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석식(李石植)과 어머니 정막랑(鄭莫郞)의 외아들로 1921년 1월 7일 경상북도 영일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 나고야의 실업학교[茼井實業學校]를 마쳤다. 그 뒤 대학 진학을 준비하던 중 아버지의 엄명으로 22세 때 귀국해 이선애(李善愛)와 결혼하였다.
6·25전쟁이 끝난 이듬해 1954년 그는 저축한 돈으로 조봉구(趙奉九:삼호그룹 회장)와 동업, 경남모방(慶南毛紡)이라는 소모방(梳毛紡)을 차려 섬유사업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동업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1954년 단독으로 부산시 문현동에 태광산업사(泰光産業社)를 창설하여 경영하였는데 이것이 태광그룹의 모체이다.
1961년 9월 태광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이듬해 9월부터는 무역업무를 개시하는 등 책임경영을 하였다. 1963년에는 동양합섬주식회사(東洋合纖株式會社)를 설립하고, 1966년부터는 대표이사를 맡아 이끌었다. 1960년대 경제개발과 수출이 국가적 과제로 부각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누렸다.
당시 주력 상품인 모방직물인 아크릴은 경쟁업체가 적은 데다 양모의 대체품으로 수요가 많아 때마침 불어닥친 스웨터 수출 호경기로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1973년 9월 흥국생명보험주식회사(興國生命保險株式會社)를 인수한 뒤에 여러 금융업에도 사업영역을 확대하였다.
아울러 대한화섬(大韓化纖)·천일사(天一社) 등을 인수한 것을 비롯하여 광진섬유(光進纖維)를 설립하여 도약기에 접어들었다. 그는 ‘절약이 곧 버는 것’이라는 절약경영과 ‘남의 돈을 빌려 쓰지 않고 번 만큼 투자’ 하는 실속경영으로 기존 업체는 더욱 튼튼히 키우고, 인수한 부실기업은 흑자경영으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경영철학으로 1985년 동래소모방공장 화재로 당시 400억 원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동래공장 3,000여 근로자를 한 명도 감원하지 않고 외부 도움 없이 10개월 만에 재기하는 저력을 보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의 경영전략은 무리한 사업확장이나 투자 대신에 보수적인 경영전략으로 안정적인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는 섬유산업을 모태로 흥국생명보험과 고려상호신용금고 등의 금융업, 그리고 골프장을 운영하는 태광관광개발 등을 이끌었다. 그는 외부에서 전문경영인을 영입하지 않고 공채 출신을 중요한 자리에 기용하는 등의 경영전략을 채택하였다.
그의 좌우명(座右銘)은 ‘기업을 통하여 사회의 불안을 해소한다’는 것이다. 즉, 기업을 통하여 다소라도 사회의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 기업의 목적이요 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같이 근무하는 근로자가 인간자본이요, 큰 자랑스러운 자산’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교육사업에도 뜻을 두고 학교법인 일주학원(一洲學園)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全國經濟人聯合會) 이사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수상 경력으로는 수출유공 대통령 표창·동탑산업훈장·대통령 표창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