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민 출신으로 개잡는 일을 업으로 삼았는데, 용력으로 이름이 나서 권신 김준(金俊)의 아들 김주(金柱)에게 신임을 받았으나, 김준 부자가 피살된 뒤 도망쳐 화를 면하였다.
1272년(원종 13)에 산원(散員)으로 제주초유사(濟州招諭使) 금훈(琴熏)과 함께 제주의 삼별초(三別抄)를 초유하러 가다가 풍랑으로 보마도(甫麻島)에 표박중 삼별초에게 잡혀 추자도에 억류되었다가 돌아왔다.
충렬왕 유모의 사위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아 응방(鷹坊)을 관장하여 원나라에 보낼 매[鷹] 잡는 일을 맡았는데, 불량배를 모아 행패가 심하였다. 1279년(충렬왕 5)에 충청도응방사가 되었고, 뒤에 장군이 되었으나, 1281년 제2차 일본정벌 때 관직을 사임하여 징발됨을 피하였다.
한편, 영관(伶官: 樂官) 김대직(金大直)의 딸을 사랑하여 영관은 7품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한다는 법을 어기고 종6품인 지후(祗候)에 임명하게 하였다. 뒤에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가 되었는데, 천민으로 재상이 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왕과 공주를 자주 자기의 집에 행차하게 하며, 왕으로 하여금 자주 놀고 사냥하게 하여 주군(州郡)을 침탈하는 등 기강을 문란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