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전(衙前)마을’·‘향리마을’이라고도 하였다. 이족은 지위의 세습 여부에 따라 그 지방출신으로 아전을 대대로 맡는 향리와, 다른 지방에 와서 임시로 근무하는 가리(假吏)로 구분할 수 있다. 이족촌은 전자가 집단적으로 거주한 마을을 가리킨다.
이 마을은 중앙과 지방의 관청 주변 성내에 형성되었다. 이들은 대대로 토성이족(土姓吏族)인 호장에 의하여 자치적으로 통치되었다. 향리는 토성이족이라 하여 고려 이후 지방의 토착적인 지배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같은 신분끼리 혼인하거나 지역집단을 이룸으로써 그들간의 내적 결속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조선의 취락』에 의하면, 장성면 이족촌의 경우, 과거에는 읍리들이 주로 거주하고 농업·상업·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으나, 최근에는 농업을 하는 사람들이 점차 나타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의성읍내 일원의 이족촌의 경우, 조사 당시 가구 수가 1,117호로 그 규모가 상당히 크며, 수백 년간 지방행정 집행을 담당하여 군 일대를 지배해 왔다고 한다. 과거에는 이 마을에도 대부분 영리(營吏)와 이족이 거주해 왔으며, 해주오씨(海州吳氏)·경주이씨(慶州李氏)·의성김씨(義城金氏)·김해김씨(金海金氏)의 동족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사 당시 마을 주민들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촌락의 문화 수준은 반촌(班村)과 비슷한 성격을 보였다고 한다.
조선의 멸망과 함께 이족촌은 공식적으로는 사라졌지만, 역사가 오랜 지역에서는 그들의 터전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전통적인 지역일수록 거주지를 문밖인 양반촌과 문안인 이족촌으로 구분하는 등 우월·비하 의식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