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청(子淸). 아버지는 세종의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이다. 1458년(세조 4)에 구성정(龜城正)에, 이어 구성윤(龜城尹)으로 봉해졌다. 1463년에 구성군으로 봉하여졌으며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전했기 때문에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27세에 함경·강원·평안·황해의 사도병마도총사(四道兵馬都摠使)에 임명되어 이를 토평한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훈봉되고,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영의정으로 특서되어 일품종실(一品宗室)이 되었다.
1469년(예종 1) 5월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훈봉되었다. 이듬해에 아버지 임영대군의 상을 당하여 영의정 직임을 내어놓았다.
1470년(성종 1) 정월 나이 어린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는 정인지(鄭麟趾) 등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을 당하고 경상도 영해(寧海)로 귀양갔으나, 왕족이므로 배려를 받아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았으며 곡식을 지급 받았다. 귀양간 지 10년 만에 배소에서 죽었다.
성종은 미두(米豆) 10석, 종이 40권을 하사하고 장례를 영해 현지에서 정중히 치르도록 하였다. 1687년(숙종 13) 6월 김수항(金壽恒)이 구성군이 죄를 입은 것은 권맹희(權孟禧) 등의 난언(亂言)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신원되고 다시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