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린(季麟), 호는 중산재(重山齋). 이형신(李衡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희보(李熙輔)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이명원(李命源)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慶州金氏)로 통덕랑 김하주(金廈柱)의 딸이다.
19세에 서울로 올라가 족부(族父) 이병원(李秉源)에게 수학하였다. 1809년(순조 9) 사마시에 합격하고 1813년(순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어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거쳐 병조좌랑·시강원사서가 되고, 1825년 옥구현감으로 나갔고, 1831년 동부승지, 1840년(헌종 6) 회양부사 등을 지내고, 1842년 다시 동부승지가 되었다.
옥구현감으로 있을 때는 민폐를 없애고 백성을 구휼하는 한편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다. 동부승지가 되어서는 여러 차례 소대(召對: 왕의 부름에 의한 대좌)에 응하여 국가기본정책을 건의하였다. 만년에는 향리에 돌아와 중산재를 짓고 후진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중산재집(重山齋集)』 8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