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보숙(保叔), 호는 지암(止庵). 이만상(李萬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봉조(李鳳朝)이고, 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 이정신(李正臣)이며, 어머니는 전주 유씨(全州柳氏)로 유이진(柳以震)의 딸이다.
1723년(경종 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 해 예문관검열로 기용되고 이어 대교를 거쳐 1729년(영조 5) 봉교로 승진하였다. 1731년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1733년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과 교리(敎理)를 지냈다.
1734년 각 도에 기근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자 관서어사로 발탁되어 민정을 조사하고 탐관오리를 적발하였다. 특히, 관서지방에서 발생한 화월죄인(化越罪人) 김세정(金世丁) 등을 조사해 처리하였다. 이어 수찬에 승진하고, 1736년 왕명에 따라 경기도와 충청도에 암행해 민정을 시찰하였다.
이어 부응교(副應敎)와 응교를 지내고 사헌부로 옮겨 지평과 집의를 역임하였다. 이듬 해 다시 사간으로 옮기고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승정원의 승지로 발탁되었고 1741년 안변부사로 나가서 북방지대의 성곽을 수축하고 군기를 판비(辦備: 자금을 마련해 대비함)해 국방에 주력하였다.
1744년 대사간에 오르고, 1747년 다시 이천부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도승지와 이조참판을 지냈다. 그 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시 다녀오고 1749년 동의금부사 · 대사간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이듬 해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751년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듬 해『국조오례의』를 편수할 때 편집당상이 되었다. 1753년 동지춘추관사를 지내고 이듬 해 호조판서가 되었으나 사임하고 상소해 삭과(削科)해 줄 것을 자청하였다.
이듬 해 나주에서 일어난 괘서의 변에 주모자인 윤지(尹志)와 그 추종자들의 공사(供辭)에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자, 토역소(討逆疏)를 올려 자기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죄인의 엄중처단을 강조하였다.
1755년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 · 연접도감당상(延接都監堂上) · 공조판서 등을 지내고 이듬 해 판의금부사 · 병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올랐다.
1757년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 일종의 정년퇴임 같은 것임)하고 향리로 돌아오니 영조가 공로를 치하해 수어사(守禦使)에 제수하고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뒤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동생 이길보(李吉輔)와 함께 기로소에 들어간 데 이어 아들 이복원(李福源)과 손자 이시수(李時秀)가 모두 기로소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어 조선시대 최초의 삼세입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지암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