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8년(세종 30) 내시로서 황해감사 신자근(申自謹)과 더불어 황해도 일대의 기근 실태를 조사하고 풍천에 1명, 재령에 3명, 신천에 9명의 기사자가 있었음을 보고하였다.
1455년(세조 1)에는 김종서(金宗瑞)·안평대군(安平大君)을 제거하는 데 반대한 혐의로 고신(告身: 관직 임명 사령장)을 박탈당하고 가산을 적몰당하였으며, 관노가 되어 정배되었다가 1468년에 고신을 환급받았다. 그뒤 1490년(성종 21)에 돈용교위(敦勇校尉)로 승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