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차례에 걸쳐 군량미 4,000여석을 헌납하였다. 비변사는 당상관의 실직(實職)을 제수할 것을 상서하였고, 이듬해 또 100여석을 헌납하였음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이어 삼화(三和: 지금의 평안남도 용강군 삼화면)현령이 되었다.
2품의 관계를 하사받아 망극한 국은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 위함이라 하여 1607년 궁궐의 보수와 군기(軍器) 제조에 써달라고 정철(正鐵) 566근을 상납하였다.
그러나 대북의 이이첨(李爾瞻) 등이 소북파를 제거하고자 일으킨 김직재(金直哉)의 역모의 흉서가 그의 집에 던저져서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광해군의 친국을 받게 되었다.
당시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이 그가 일자무식임을 역설하고 구출에 힘써 1613년(광해군 5) 나이가 이미 70을 넘었으므로 그 아들 이덕보(李德甫)를 먼저 심문하기로 하고 그는 가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