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는 미상이다. 1408년(태종 8) 일본 지좌전객인(志佐殿客人)의 호송관으로서 포로 28인을 데려왔다. 1423년(세종 5) 말경에 일본사신 규주(圭籌)·범령(梵齡) 등 60여인이 와서 대장경판을 내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조정에서는 대장경판은 단 한벌뿐이니 줄 수 없고, 그 대신 금자(金字)로 쓴 『화엄경』 80권과 범자(梵字)로 된 밀교경판(密敎經板) 및 주화엄경판(注華嚴經板)을 주자고 의논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통사(通事) 윤인보(尹仁甫)에 의하여 왜사신에 알려지자 왜사신은 무력으로 대장경판을 탈취하기 위하여 병선의 파송을 요청하는 서한을 일본에 보냈다.
통사 춘발은 일본사신의 수행원인 승려 가하(加賀)로부터 그 서한의 초안을 건너받아 왜사신의 음모를 예조에 보고하였다. 왜사신은 병선파송요청사실을 극구부인하면서 춘발이 승려 가하를 종용하여 꾸민 일이라고 변명하여 그는 관계 인물과 함께 의금부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 사실은 왜사의 죄과가 확실하나 이웃나라의 사신임을 들어 석방할 때 풀려났다. 그뒤 1429년 서울에서 홍성부(洪成富)·김생언(金生彦) 등에게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