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초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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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초상 / 전 김육
정몽주초상 / 전 김육
회화
작품
국가유산
고려 말의 문신 · 학자인 정몽주(鄭夢周, 1338-1392)를 그린 초상화.
이칭
이칭
정몽주영정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정몽주 초상(1991)(鄭夢周 肖像(1991))
분류
유물/일반회화/인물화/초상화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1991년 12월 16일 지정)
소재지
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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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고려 말의 문신 · 학자인 정몽주(鄭夢周, 1338-1392)를 그린 초상화.
내용

199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세로 · 가로 모두 98㎝. 비단 바탕에 채색.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임고서원(臨皐書院)에 소장되어 있는 석 점의초상화 가운데 하나로서, 그림의 오른쪽 아래 “숭정기사모본(崇禎己巳摹本)”이라고 묵서되어 있어 1629년(인조 7)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포은집(圃隱集)』 권2 「화상(畫像)」조에 의하면, 정몽주 초상은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공양왕을 추대한 공으로 좌명공신에 책록되었을 때 그려진 것이 처음이다. 현재 이 원본은 전해 오지 않는다.

이 원본으로부터 이모한 본들이 임고서원과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포은선생영당, 전라남도 장흥군 장평면 용강영당(龍岡影堂), 국립중앙박물관 및 서울대학교 박물관 등에 있다. 그리고 정몽주 초상의 판화본도 『포은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 정몽주 초상은 모두 이모본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상용 형식이 꼭 같다. 그러므로 애초에는 동일한 본, 즉 공양왕 때의 좌명공신상에서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1555년(명종 10년)에 좌명공신상으로부터 직접 이모한 본이 임진왜란 후 너무 해어지고 버지게 되자 1629년(인조 7)에 당시 서원의 유림들이 화사 김육(金堉)에게 다시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 상은 좌안팔분면(左顔八分面)의 안모에 여말선초의 복제인 오사모(烏絲帽)에 청포단령(靑袍團領)을 입고 1품인 삽화금대(鈒花金帶)를 두르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이다. 배경이나 아래에 깐 자리는 없으며 전형적인 고려 말의 공신도상 형식에 의거하고 있다. 얼굴이나 옷주름도 선묘로만 처리되어 있어 고식(古式)을 나타낸다.

얼굴표현, 교의자의 양쪽 손잡이 방향을 상반되게 그린 점, 의자 옆에 매어진 끈, 발받침대 위에 나란히 오른쪽을 향한 발의 표현 등에서 「신숙주 초상」과 같은 조선 초기 공신도상과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또한, 의자에 비끄러맨 끈이나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손을 중심으로 하여 소매의 주름이 대칭적 변화를 보이는 점, 왼쪽 단령의 트임 사이로 내비치는 안감과 첩리(帖裡: 철릭, 무관공복)가 겹겹이 보이는 점 등은 고려 말 조선 초의 공신도상에서 살필 수 있는 전형적인 특색이다.

그래서 고려 말의 원본이 전해 오지 않는 현 상황에서 원본에 가장 충실한 본으로서 주목할 만한 초상화이다.

참고문헌

『포은집(圃隱集)』
『한국의 초상화』(조선미, 열화당,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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