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식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명
임성재(林盛哉)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4년(고종 31) 8월 29일
사망 연도
1971년 2월 25일
출생지
경기도 개성
대표 상훈
건국포장(1977)|건국훈장 애국장(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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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임유식은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독립단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계하면서 군자금 모집에 관한 증명서와 권총을 들고 부호가를 돌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징수하여 임시정부로 보냈다. 1922년 1월에 검거되어 징역 10년 형을 언도받았다.

정의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인적 사항

임유식(林懰植)은 1894년(고종 31) 8월 29일 경기도 개성 출생으로, 본적지는 경기도 개성 관훈동 174이다. 이명은 성재(盛哉)이다. 부친이 서당을 경영하는 등 식자층이었고 집안 환경도 부유한 편이었다고 한다.

임유식은 면사무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고향에 모친, 아내와 아이들이 살았는데, 생활이 곤란하여 서울을 오가면서 토지를 매매하고 인삼 중개를 하면서 생계를 이었다. 1971년 2월 25일에 사망하였다.

주요 활동

임유식은 대한독립단원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일을 하였다고 한다. 대한독립단은 3 · 1운동 이후 서간도에서 망명한 의병운동 세력이 통합한 조직이며, 군자금 모집과 군인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임유식은 임시정부와 연락하여 태극기 5,000매를 배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3 · 1운동 후에는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이동휘(李東輝)의 증명이 찍한 가정부파견원(假政府派遣員)이라 쓴 군자금 모집원 증명서와 권총을 들고 자금을 모집하였다.

국내에 들어와서는 20여 차례에 걸쳐 21만여 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이를 임시정부와 대한독립단에 송금하는 등 활발한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1월 9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논문

박성순, 「대한독립단의 위상과 대한광복군사령부의 성립」(『숭실사학』 445, 숭실대학교사학회, 2020)
이성우, 「재만 대한광복단의 조직과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 4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신문

『매일신보』(1922. 1. 20.)

인터넷 자료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List.do?goTocode=20001)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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