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식(林懰植)은 1894년(고종 31) 8월 29일 경기도 개성 출생으로, 본적지는 경기도 개성 관훈동 174이다. 이명은 성재(盛哉)이다. 부친이 서당을 경영하는 등 식자층이었고 집안 환경도 부유한 편이었다고 한다.
임유식은 면사무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고향에 모친, 아내와 아이들이 살았는데, 생활이 곤란하여 서울을 오가면서 토지를 매매하고 인삼 중개를 하면서 생계를 이었다. 1971년 2월 25일에 사망하였다.
임유식은 대한독립단원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일을 하였다고 한다. 대한독립단은 3 · 1운동 이후 서간도에서 망명한 의병운동 세력이 통합한 조직이며, 군자금 모집과 군인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임유식은 임시정부와 연락하여 태극기 5,000매를 배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3 · 1운동 후에는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이동휘(李東輝)의 증명이 찍한 가정부파견원(假政府派遣員)이라 쓴 군자금 모집원 증명서와 권총을 들고 자금을 모집하였다.
국내에 들어와서는 20여 차례에 걸쳐 21만여 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이를 임시정부와 대한독립단에 송금하는 등 활발한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1월 9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