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출신. 평양숭실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와 신민회(新民會) 평양지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황해도 안악군 동창면에 설립되었던 사립 배영학교(培英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활동하던 중 사상이 불온하다면서 일제가 계속 간섭하자 이에 사임하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만주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양기탁(梁起鐸)을 만나 국내외정세에 관하여 의논하고 다시 국내에서 투쟁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뒤 고향인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로 돌아와 정세를 관망하고 있던 중 3·1운동을 맞았다. 원장교회의 장로 겸 합성학교(合成學校)의 교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당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원장 장날인 3월 4일을 기하여 학교에서 독립선언식을 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주동자 중 최양근(崔養根)을 비롯한 10여 명이 헌병보조원에게 발각, 검거되었었지만, 3월 4일 합성학교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임이걸 등의 연설로 만세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시위 군중은 모두 태극기를 들고 원장 거리로 행진하였다. 시위대열에 장꾼들까지 합세하여 군중은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반석교회 장로 최능현(崔能賢)이 상사리에 구금되어 있는 애국지사를 구출하기 위해 모락장[沙川市場]으로 행진할 것을 주장하여, 25리쯤 떨어져 있는 모락장으로 행진하였다.
그런데 한 청년이 “반석면장 김종화(金宗化)가 오늘의 거사 계획을 밀고하여 일본 헌병들이 모락장 입구에 무장하고 매복하여 있다.”는 사실을 전하였다.
시위 군중은 위축되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여 모락장 입구에 이르렀다. 매복하고 있던 일본헌병들이 발포하여 곳곳에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임이걸은 청년들과 함께 투석으로 대항하며 계속 전진하였다.
사태가 불리해지자 일본헌병 분견소장 사토[佐藤]와 보조원 3명이 도망가려 하였다. 분노한 시위 군중은 이들을 붙잡아 살해하고 구금 중이던 애국지사 전원을 구출하였다. 이 날 모락장 진군은 일단 성공하였으나, 일본헌병과의 충돌로 1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만세운동을 선두에서 주동한 뒤 만주로 망명했으나, 결국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5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평양에서 사업을 하다가 광복 이후 남하해 부산에서 독실한 기독교신앙생활을 하며 일생을 마쳤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