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군은 지리적 위치가 만주로 통행하기 쉬운 곳이므로 일본경찰의 감시가 삼엄하였다.
홍범도를 중심으로 한 대한독립군은 국내진입 작전을 전개하여, 이범윤(李範允)·황병길(黃丙吉) 등이 지휘하는 다른 독립군부대와 연락하여 백두산 부근에 근거를 두고 여러 방면으로 대규모의 국내진입 작전계획을 세워 이를 상해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당시 임시정부를 주도하던 안창호(安昌浩)로부터 이 계획은 시기상조이므로 11월까지 연기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임시정부의 권고에 따르지 않고 이 해 10월, 압록강을 건너 강계(江界)·만포진(滿浦鎭)을 함락시키고, 자성군의 일본군을 기습하였다.
이 때 대한독립군은 일본군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홍범도사령관의 과감·민활한 지휘를 받아가며 분전한 결과, 3일동안 적군 70여명을 살상하였다. 이같은 승리의 소식은 국내외에 널리 전파되어 인심을 크게 진작시켰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상해임시정부에서는 당시 평안북도의 강변 8군을 대상으로 설치하였던 임시지방교통 사무국에 명하여 참사(參事) 오동진(吳東振) 및 김응식(金應植)에게 현지에 출장하여 사실을 확인하게 하였으며, 일제는 조선군사령부의 인근 주둔부대를 동원하여 연안지방 일대에 철통같은 경계망을 펴는 한편, 현지 애국동포들을 검속하여 악독한 고문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