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옥산(玉山). 자는 태래(泰來), 호는 만회당(晩悔堂). 인동(仁同) 출생. 아버지는 장내범(張乃範)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진위장군 이운배(李雲培)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10여세의 나이로 할머니를 모시고 금오산(金烏山)·청송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란하였다. 1608년 난 후 학교를 부흥시키고자 「학교의식」을 지어서 학교 교육의 지침으로 삼았다. 이듬해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서울에서 시행하는 식년과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정구(鄭逑)가 반대파의 모해로 관직을 삭탈당하자 경상도내 유생들을 권유하여 함께 변무소(辨誣疏)를 올렸다. 1612년(광해군 4) 어지러워져가는 조야의 모습을 바로잡고자 『저법육설(著法六說)』을 지어 시행하였고, 1621년 이이첨(李爾瞻)의 행패가 심해지자 「청참이이첨소(請斬李爾瞻疏)」를 올려 이이첨을 참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1627년(인조 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인동의병장에 차정되기도 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상에 3년간 시묘하였다. 『여헌문집』을 간행하고 『제선의절(祭先儀節)』을 만들어 시행하도록 권장하였으며, 화산서당(花山書堂)을 건립하여 후진의 교육에 힘썼다.
1654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만회당집(晩悔堂集)』 4권이 있다. 뒤에 옥계사(玉溪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