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의주 출신. 1926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 가입하여 제5중대원이 되었다. 1927년 5중대 상등병으로서 중대장 김석하(金錫河)의 명령을 받아 홍학순(洪學淳)·이근수(李根秀)·김봉수(金鳳秀) 등과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7월 15일 의주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일본 경찰의 밀정인 계승호(桂承浩)와 주민을 괴롭히는 악질 삼림간수 강영화(姜榮化)를 납치, 사형선고문을 낭독한 뒤 사살하였다. 8월 11일에는 의주군 수진면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17일에는 수진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18일에는 4명의 독립군을 2명씩 2개 조로 나누어 1개 조는 식산은행 지점을, 다른 1개 조는 용만금융조합(龍灣金融組合)을 습격하게 하였다. 두 곳에서 수천 원의 현금을 빼앗은 뒤 시장으로 나와 군중들을 모아 놓고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연설을 한 뒤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이때 일본 경찰이 추격하여 오자 총으로 쏘아 중상을 입힌 뒤 빼앗은 현금을 군중에게 뿌리고 그 혼란을 틈타 탈출하였다.
19일 일본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건너갔으나 그곳까지 추격해 온 일본 경찰대와 구련성(九連城)에서 40분간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다 봉황성 본부로 귀환 도중 최성준(崔成俊)과 함께 일본 경찰에 잡혔다. 1929년 9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0년 7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