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사적은 자세하지 않다. 단지 그가 비문과 전액(篆額)을 쓴 문경 희양산(曦陽山)「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와 여주 혜목산(慧目山)「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院元宗大師慧眞塔碑)」의 명문을 통하여 한림원 서박사(書博士)를 거쳐 군부경(軍府卿)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금석으로 비갈(碑碣)은 고려서예의 정화라 할 수 있는데,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초당(初唐)의 해서필법을 따랐다. 그 중에서도 구양순(歐陽詢)의 필법이 지배적으로 성행하였다.
고려시대 사람으로서 장단열은 드물게도 우세남(虞世南)의 필법에 정통하였다. 965년(광종 16)에 세워진 「정진대사비」는 무르익은 우세남풍으로 아취(雅趣)·신운(神韻)이 있으며, 초당의 비들에 견줄만한 고려시대 제1급의 명품이다.
또한, 975년에 세워진 「원종대사비」는 우세남에 가까우면서도 그의 개성적인 필의가 가미되어 있는데, 「정진대사비」에 비하여 점획이 웅경(雄勁)하며 단정한 필치가 엿보이는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