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암산성(笠岩山城)은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에 있는 해발 654m의 입암산 능선을 따라 형성되었으며, 초축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시대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포곡식산성이다. 입암산성의 평면 형태는 북서-남동이 장축방향인 타원형에 가깝다. 성의 둘레는 성벽 외곽을 기준으로 약 5,200m이고, 총면적은 1,069,255㎡이다.
입암산성에 대해서는 1871년(고종 8)본으로 알려진 『호남읍지(湖南邑誌)』에 수록되어 있는 『장성부읍지(長城府邑誌)』와 『입암산성진지(笠岩山城鎭誌)』에 수축과정, 성내 시설물, 군제에 대한 현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입암산성도(笠岩山城圖)」와 각종의 「장성부지도(長城府地圖)」에는 입암산성이 비교적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서적류의 관련 기록과 매우 흡사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입암산성진지』 공해조(公廨條)에는 진헌(鎭軒), 거안관(居安館), 안국사(安國寺), 군량고 7동, 군기고 5동, 소금창고와 장고(醬庫)가 각각 1개소, 연못 10개소, 우물 10개소 등 각종 시설에 대한 상세한 내용과 함께 축성 속읍(屬邑)과 군기, 군량미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입암산성도」에는 연못 6개소가 표현되어 있다. 199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입암산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등장하는데, 1256년(고종 43) 3월에 송군비(宋君斐) 장군이 주민과 함께 몽골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으로 대몽항쟁과 관련된 내용이다. 이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에는 1410년(태종 10) 왜구(倭寇)에 대한 대비책의 일환으로 주변의 여러 성들과 함께 수축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연해지역이 안정을 되찾고 읍성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1434년(세종 16) 다른 산성과 함께 혁파되면서 폐성되었다.
이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인 1593년(선조 26)에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다시 수축하였고,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는 1653년(효종 4)에 장성현감 이유형(李惟馨)이, 그리고 『장성부읍지』에는 1677년(숙종 3)에 부사 홍석구(洪錫龜)가 각각 확장·개축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다가 1894년(고종 31) 이후에 폐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입암산성은 2003년에 지표조사를, 그리고 2006년에는 남문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성벽과 문지 등 여러 시설들이 확인되었다.
성벽 위에는 치첩이 설치되었고, 문은 남문과 북문 등 2개소가 있었으며, 암문(暗門)이 3개소, 포루가 4개소, 내지 5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입암산성도」에는 남문과 북문이 있고, 장대는 4개가 있으며,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건물이 2개가 있어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높이 2.6m∼3.5m 내외로 쌓았고, 일부 암반이 있는 곳은 1∼2m 내외로 쌓았으며, 성벽의 안쪽은 편축식으로 축조하였다. 그리고 일부 구간에서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높이 1m 내외의 여장(女墻)을 설치하였다.
성곽 시설물은 남문지 남동쪽 아래에 치(雉)가 복원되었고, 북쪽 성벽에서도 치로 추정되는 곳이 있지만 단정하기는 어려우며, 수구(水口)도 남문지 남동쪽 아래에 1개소가 복원되었다. 성벽 위의 시설은 장대지 6개소가 확인되었고, 암문지는 동쪽과 북쪽 그리고 서쪽에서 각각 1개소씩 총 3개소를 발견하였으며, 문지는 현재 남문지와 북문지만 남아 있다.
남문지는 2번 이상의 개․보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건물지와 육축, 여장시설 등의 유구들이 확인되었다. 건물지는 동서쪽에서 각각 초석이 확인되면서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고,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추정된다.
입암산성은 특히 성내에 크고 작은 방축(防築)을 두어 수원(水源)을 확보하여 장기간의 농성이 가능하도록 배려한 점 등에서 전남지역 관방시설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