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9년(광해군 11) 자기 소유의 집터를 왕실에 바쳐 벼슬을 얻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시 형 장유(張維)와 함께, 당시 궁궐을 수비하던 장인 이흥립(李興立)을 설득하여 내응하게 하는 한편, 직접 왕궁진입에도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장유는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그는 3등에 책록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이후 남한산성을 수비하기 위하여 삼전도(三田渡)를 요새화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그해 황해도감사가 되자 황주성을 수축하였다.
그러던 중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근거를 두고 후금에 항전하다가 황해도로 옮겨온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꺼려 그 이듬해 감사직을 사퇴하였다. 그 뒤 수원부사, 다시 황해도감사·평안도감사를 지냈고, 1636년 강화유수로 전임되었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을 당하여 강도(江都)방위를 맡게 되었는데,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왕실과 노모를 버리고 먼저 도망하여 강도가 함락되었다. 사헌부에서 그를 참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전일의 공로를 생각하여 자진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