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후상 ()

석문시고 / 무신난기
석문시고 / 무신난기
유교
인물
조선후기 성균관사예, 예조정랑, 양산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이칭
몽여(蒙予)
석문(石門)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77년(숙종 3)
사망 연도
1742년(영조 18)
본관
인동(仁同)
출생지
안동
주요 관직
성균관사예|예조정랑|양산군수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후기 성균관사예, 예조정랑, 양산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몽여(蒙予), 호는 석문(石門). 안동 출신. 아버지는 첨지중추 장유(張瑜)이며,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로 김돈(金墩)의 딸이다. 장신(張璶)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99년(숙종 2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같은 급제자 중의 김인지(金麟至)와 이도징(李道徵)이 시관에게 뇌물을 주고 부정합격된 사실이 발각되어, 시험 자체가 무효화되고 홍패를 수거당하였다. 170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니 세상사람들이 선급제후진사(先及第後進士)라고 불렀다.

이 소문이 왕에게 알려져 1699년 급제자 중 부정에 관계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다시 합격되었다. 그 뒤 성균관의 학유·학록·학정을 거쳐 1714년 박사가 되었고, 이듬해 전적에 올랐다. 1716년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1720년 성균관직강이 되었다.

1722년(경종 2) 성균관사예를 거쳐 예조정랑이 되었으며, 이듬해 함흥의 능침실화사건에 이사상(李師尙)과 함께 봉심관(奉審官)이 되어 다녀왔다. 그 뒤 양산군수로 나가서는 탐리를 다스리고, 세금과 부역을 경감하며, 생업을 권장하는 등 선정을 펴 군민이 장후상의 공적을 추모하여 철비를 세웠다.

1726년(영조 2)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28년 이인좌의 난에는 근왕병을 일으켜서 적을 막았다. 저서로는 『석문시고(石門詩稿)』 3권이 있다.

참고문헌

『국조방목(國朝榜目)』
『석문시고(石門詩稿)』
『숙종실록(肅宗實錄)』
관련 미디어 (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