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장흥창은 고려시대에 현 전라남도 영암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고려시대에 설치한 전국 13조창 중 하나로, 영암, 장흥 및 그 속군현의 세곡을 모아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전라도 서남부의 세곡을 모아 서해안을 따라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운송용 초마선은 6척을 두었는데 1척당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다고 한다. 판관이 세곡 운송과 보관을 관리, 감독하였고, 외관(外官)의 녹봉 규정에 따라 20석이 지급되었다. 장흥창의 폐쇄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 말기에 폐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의
고려시대에 현 전라남도 영암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
개설
내용
장흥창의 현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영암천 유역의 현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가 가장 유력하다. 망호리 지역은 영암 중심지와 가까우며, 영산강 하구로부터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영암천과 그 지류인 망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였다. 배후에는 야트막한 구릉이 위치하고 있어, 타 지역의 고려시대 조창과 유사한 입지적 특징을 갖고 있다. 현재 영암천 주변 일대는 농경지로 개간되어 있으나, 과거에는 영산강 하구로부터 망호리 일대까지 바닷물이 깊숙이 들어오던 만(灣)의 경관을 갖고 있었다. 한편 조동포는 망호리에, 장흥창은 영암 읍치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영암 읍내에서 망호리 포구 터 사이에는 직선으로 겨우 2㎞ 정도 떨어져 있고 영암과 같은 큰 고을의 읍치 지역에 조창이 두어졌던 사례를 찾을 수 없으므로, 장흥창 역시 망호리 포구 인근에 위치하였음이 확실하다. 다만 현재 망호리 인근에서 조창과 연관된 유적은 찾아지지 않는다. 그 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죽성포(竹城浦)로 기록한 현 해남군 마산면 맹진리를 장흥창 터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 지역은 고려시대에 죽산현의 영역이라 장흥창이 영암에 있었다는 『고려사』의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다.
『고려사』에는 정종(靖宗) 때(1034~1046) 전국 각 조창에 배치할 조운선의 숫자를 정하면서, 장흥창에는 1척 당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哨馬船) 6척을 두었다고 한다. 장흥창에 모인 세곡은 서해안을 따라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되었다. 장흥창을 비롯한 13조창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조창을 드나드는 세곡의 보관 및 운송과 관련된 실무를 담당했을 것이며, 13조창에는 판관(判官)이 임명되어 각 조창에서의 세곡 운송과 보관을 관리, 감독하였다. 인종 때(1122~1146년) 개정된 외관(外官)의 녹봉 규정에 따르면, 13창의 판관에게는 20석의 녹봉이 지급되었다.
변천과 현황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 고려시대 조운제도 연구』(문경호, 혜안, 2014)
- 『 고려시대 교통운수사 연구』(한정훈, 혜안, 2013)
- 『영산강 뱃길과 포구 연구』(변남주, 민속원, 2012)
- 『 한국사: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14(국사편찬위원회 편, 탐구당, 1993)
- 「고려~조선전기 조창(漕倉)의 분포와 입지」(정요근, 『한국사학보』 57, 고려사학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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