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한인,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 해외 교포(海外僑胞), 해외 동포(海外同胞), 해외 한민족이라고도 한다. 한교(韓僑) 또는 조교(朝僑)라고도 하는데, 한교는 한국인 교포를 말하고 조교는 조선인 교포를 말한다. 우리나라 행정부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재외동포로서, 재외동포란 외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의 혈통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재외동포는 다시 재외 국민(在外國民)과 한국계 외국인(韓國系 外國人)으로 구분된다. 재외 국민이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외국에 거주하거나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하고, 한국계 외국인이란 외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을 말한다.
외교부에서 발간한 『재외동포 현황 2021』에 따르면 2021년 현재 재외 교포는 732만여 명에 달한다. 재외동포를 지역별로 집계하면 중국에 2,350,422명, 일본에 818,865명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에 3,169,287명이 분포하고 있으며, 미국에 2,633,777명, 캐나다에 237,364명으로 북미지역에 2,871,141명이 분포한다. 그밖에 유럽에 677,156명, 남아시아태평양 지역에 489,420명, 중남미 지역에 90,289명, 중동 지역에 18,379명, 아프리카 지역에 9,471명이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재외 한인 교포 수는 중국의 화교, 이스라엘의 해외 유태인, 이탈리아 해외 교포 다음으로 많아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규모의 해외 교포 인구에 해당한다.
한반도 주민이 외국으로 이주한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표적인 예로 신라인들이 중국 산동성 문등현(文登縣)에 건립한 신라방(新羅坊)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해외 무역이 활발했고 원나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전란의 와중에도 많은 한인이 해외로 이주한 역사가 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현지에 흡수되고 동화되어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현재 그 후손을 파악하기 어렵다.
현재까지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한민족 해외 이주의 역사는 대체로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이후 한민족 해외 이주사는 크게 다섯 개의 국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번째 국면은 조선시대 말기인 1860년~1910년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세도 정치를 배경으로 한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연이은 흉년으로 인한 기근과 빈곤으로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민란이 빈발했던 시대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한반도 북부 지역 주민들 중 일부는 중국 동북 지역인 만주나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1860년대에 함경북도 산간 지대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연해주로 이주한 기록이 있는데, 특히 1869년의 흉년으로 많은 농민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또한 1902년에는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로 최초의 노동 이민이 시작되었다. 이들 이민은 대부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 수급을 위해 신설된 수민원(綏民院)을 통해 최초로 정부의 보호하에 이루어진 집단적 노동 이민이었다. 수민원을 통한 하와이 노동 이민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면서 중단된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자 일부 우국지사들이 유민의 대열에 합류하였으며, 러시아와 중국으로 이주하여 해외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두번째 국면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1945년의 시기이다. 일제의 국권 침탈에 저항하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한반도를 떠나 해외에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고자 이주했는데, 특히 국권을 빼앗긴 1910년과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이후 많은 우국지사들이 해외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일부 엘리트층에 국한되지만 이 시기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청년들도 크게 늘어났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제의 농업 식민화 정책으로 일제하 조선의 전반적인 농업 생산성은 향상되었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변함없는 빈곤 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이는 농민들의 집단적 이농의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기에 일본이 경제 호황을 맞으면서 일본 열도의 노동력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는 식민지 조선인들이 1920년대부터 크게 늘어났다. 처음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고향에 처자를 둔 농민들로 단기간 일본에서 돈벌이를 하고 돌아오려는 임시 노동자들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 노동자의 수도 증가하였고 체류 기간도 장기화하는 경향을 띠었다. 만주사변(1931) 이후 1932년 만주국이 건국되고 일본의 만주 개발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만주의 농촌 지역 개발에 조선인들을 활용하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만주를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인식하여 만주로 이주하는 조선인들이 크게 늘어났다. 이 시기 만주 지역으로 집단 이주한 한인들은 약 50만 명에 달하는데 이들 중 절반 정도가 농촌 지역 집단 이주자들이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제국 일본이 전시 체제로 돌입하면서 부족한 노동력 수급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일본 열도는 물론, 일본의 해외 영토 곳곳으로 조선인들이 노무자로 동원되었다. 이들 조선인들은 광산, 건설 현장, 군수 공장 등지에서 일했으며, 일제 말기에는 부족한 노동력과 병력을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로 징발하는 징용과 징병 정책이 시행되기도 했다. 일제하 해외로 이주한 한인들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상당수가 한반도로 귀환했지만, 현지에 잔류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가령 1945년 8월 당시 일본 열도에 거주하는 한인 인구는 약 230만 명에 달했는데, 이들 중 약 60만 명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일본에 남게 된 이들이 재일 동포가 되었다.
세번째 국면은 1945년~1960년대 초반까지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공식적인 이민 정책은 수립되지 못한 시기에 해당한다. 특히 1950년부터 1953년까지 6·25전쟁으로 수많은 전쟁고아가 생겨났으며,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면서 미군과 결혼한 여성과 이들이 출산한 혼혈아도 생겨났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하에 1950년부터 1964년까지 약 6천 명의 여성들이 미군 배우자를 따라서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약 5천 명의 어린이가 미국의 가정으로 입양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또한 약 6천 명의 학생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미국에 정착했다.
네번째 국면은 1960년대 중반1997년까지로 한국 정부가 이민 정책을 수립하여 남미, 서유럽, 중동, 북미 각지로 집단 이민과 계약 이민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시기이다. 이 시기 이민 정책의 목적은 잉여 인구를 외국으로 내보내서 인구 압력을 줄이려는 것과 교포 송금을 통해 외화벌이를 노린 것으로 요약된다. 1960년대 초부터 외화벌이를 위해 서독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은 애초에는 3년 계약의 기술 연수생 자격으로 이주하였으나 8천여 명의 광부와 1만여 명의 간호사 대부분이 계약 기간 만료 후 독일에 남았으며 이후 독일 이외의 유럽 각국에 흩어져 오늘날 유럽의 한인 사회를 형성하였다. 한인 해외 이주사에 획을 그은 것은 1965년 미국이 이민법을 개정하여 아시아 인종에 대해 문호를 개방한 정책적 변화이다. 이때부터 미국과 캐나다로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늘어나게 되었으며, 중남미로의 이주도 시작되었다. 특히 북미 지역으로의 이민자들은 대도시에 거주하는 고학력, 화이트칼라층이 많았다. 북미 지역으로의 이민은 197080년대에 걸쳐 지속적인 증가세를 띠다가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을 정점으로 소강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재외교포 이민사에 또 하나의 큰 계기가 된 것은 베트남전쟁이다. 베트남전쟁에는 베트남에 파견한 한국군 장병뿐만 아니라 건설 회사 노동자들도 적지 않게 진출하였고, 베트남 주재 미국 회사에도 많은 한인들이 고용되었다. 1975년 베트남전쟁 종전 이후 중동 지역 건설 붐이 일어나자 많은 건설 회사 노동자들이 중동으로 이주하였고, 일부 사람들은 동남아시아 각국으로 분산하여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마지막 다섯번째 국면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현재까지의 시기이다.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가 발전하면서 감소 추세를 보이던 한국인 해외 이주는 외환 위기 이후 다시 증가세로 돌아서게 된다. 이 시기에는 미국으로의 이주는 상대적으로 감소세를 띠게 된 반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의 이주는 증가했다. 또한 종래 해외 이민의 주종을 이루었던 가족 초청 이주는 그 비중이 줄어든 반면, 사업 이주와 취업 이주가 본격적인 증가세를 띠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한국의 국력이 신장되고 글로벌화와 정보화가 본격화되면서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과 해외 유학이 크게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재외 한인 동포는 이주 시기와 이주 지역에 따라 매우 다른 정체성을 띤다. 구한말과 일제 초기의 한인들은 주로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만주로 이주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대다수가 일본 열도나 중국 만주 등지로 이주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남북미 대륙과 유럽 등 서구 문화권으로의 이민자들이 크게 늘어났다. 재외동포들은 모두 이질적인 생활 환경과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현지 문화와 혼합된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했지만, 대부분 거주국의 모범적 소수 민족이 되었다. 특히 한인들은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매우 높아서 다른 소수 민족에 비해 다음 세대의 세대간 계층 상승 이동 비율이 높은 편에 속한다는 특징을 띤다. 주요한 해외 한인 동포들의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에는 2021년 현재 235만여 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 90% 이상이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흑룡강성, 요녕성 등 동북 3성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최초의 집단적 이주는 1860년대에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이주한 한인들로 대다수가 농민이었다. 이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일궜는데 특히 버려진 늪지대를 개간하여 논을 만들고 벼농사를 시작했다. 당시 간도 일대는 망명한 한인 우국지사들의 거점지가 되기도 했는데, 이들은 용정(龍井)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학교를 건립했다. 서전의숙을 효시로 창동학교, 광성학교, 명동학교, 정동학교, 은진서숙, 해성서숙, 대성학교, 청일학교, 동흥학교 등이 세워졌다. 또한 압록강의 대안인 서간도에는 신성학교, 삼광학교, 삼성학교, 사양학교, 신흥무관학교 등이 세워졌다. 이곳에서 배출된 인물들은 독립운동의 역군이 되고 광복 후 남북한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유명한 봉오동전투나 청산리전투가 전개된 것도 1920년 만주의 북간도 영내이다. 일본은 만주 개척을 위해 설립한 국책회사인 만선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조선인 농민들을 집단 이주시키기도 했다. 이로 인해 1937년부터 1941년 사이에 약 2만4천여 호의 농민들이 이주하여 1930년에 60만 명 정도였던 한인 인구가 1940년에는 145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동향인들의 ‘집단 부락’이 형성되었다.
1932년 만주국 건국 이후 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 의병의 일부는 관내로 이동하고 만주에 남은 사람들은 중공군과 합작을 하였다. 1945년 국공 내전이 벌어지자 만주에서 중공군과 합작으로 동북연군을 편성하였다. 한인은 항일 전쟁은 물론 국공 내전 과정에서도 인구 비례로 볼 때 중국의 56개의 민족 중에서 적극적이었다. 연변을 위시하여 동북 3성 전역에서 이 전쟁에 참가한 한인의 수는 62,942명으로 추정되며, 목숨을 잃은 한인은 3,550명에 달한다. 한인은 이주한 소수 민족이면서도 중국 공민의 자격을 받았다. 그 결과 1949년 소수 민족의 민족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종합대학인 연변대학이 설립되었다. 1950년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정부는 참전하여 북한군을 지원하였고,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2년, 연변에 조선족자치주 설치를 허용하였다. 이후로는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집거 지구’라 하고 다른 지역을 ‘산재 지구’라 하여 재중 동포를 거주지에 따라 구분하게 되었다. 집거 지역인 자치주는 인구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와 문화, 교육 등 모든 면에서 재중 한인의 중심지가 되었다. 자치주의 수도인 연길에는 자치단체인 인민정부와 인민위원회, 당위원회 등이 설치되는 등 ‘제도적으로 완결한 공동체’를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개혁 개방 이후 중국이 연해 도시를 중심으로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전통적으로 농업에 기반을 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경제력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연변 경제의 저발전으로 인한 실업, 저소득, 생활 수준의 저하는 중국의 대도시와 한국과 같은 국외로의 인구 이동을 유발하였다. 이농향도(離農向都)의 인구 이동으로 농촌지역 집거구가 약화되고, 베이징, 상하이, 칭다오 등 대도시 또는 동북의 연변, 심양, 장춘, 하얼빈, 길림, 대련 등지로 이주하는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오늘날의 재일 동포는 일제강점기 일본 열도로 이주했다가 광복 후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남은 약 60만여 명에서 비롯되는데, 2021년 현재 재일 교포 인구는 약 81만 8천여 명으로 집계된다. 재일 동포는 일본 전국 각지에 분산되어 살고 있는데, 대표적인 재일 동포 집거지를 한 곳만 꼽자면 오사카 이쿠노구(生野区)를 들 수 있다. 재일 교포는 이주 시기에 따라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전에 일본에 건너와 정착한 ‘올드커머(old comer)’와 그 이후에 이주해 온 ‘뉴커머(new comer)’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전자는 특별 영주자이고, 후자는 일반 영주자인 경우가 많다. 올드커머 중에는 일제강점기와 1948년의 제주 4·3사건을 전후하여 이주한 한국 남부 지역 출신자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이쿠노구 거주자들을 지역 연고에 따라 분류해보면 제주도 출신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일제 식민통치기인 1920년대부터 일본으로 도항하는 조선인이 급증했는데, 조선에서의 생활고를 피해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농촌에서 유출된 과잉 인구의 일부분으로, 경상도, 제주도, 전라도와 같은 남한 지역 출신들이 주류였다. 일본 정부는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을 발표하고 1939년 7월 노동력 동원 계획을 발표했는데,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 연행된 인원은 724,787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군인, 군속 365,263명을 합하면 조선인 강제 연행자 수는 100만 명을 넘는다. 여기에 추가하여 여성자원봉사대의 이름으로 20만 명의 여성이 동원되었는데 이 중 8만 명 가량이 소위 ‘종군 위안부’로 동원되었다.
광복 초기 조선인들의 귀국 러시를 배경으로 지역마다 ‘조선인 연맹’이 결성되는 한편, 일제강점기 억압되었던 한글과 한국사를 가르치는 사설 학교들도 도처에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다. 좌익적인 사상으로 기울어지게 된 조선인 연맹에 반대하는 세력이 ‘거류민단’을 결성하면서 재일 교포 사회는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1948년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지령을 받은 일본 정부가 조선 학교를 폐쇄시킨 ‘한신교육사건’을 계기로 조선인 연맹은 해산되었으나 1954년 북한 외상 남일(南日)의 ‘남일선언’이 있은 뒤 친북 성향의 ‘조선인 총연맹’인 ‘조총련’으로 재조직화되었다. 이후 민단과 조총련은 사사건건 대립했는데, 특히 극심한 대립 양상을 띤 사례로는 1960년의 북송 사건과 1974년의 문세광(文世光) 사건을 들 수 있다. 뉴커머 한인들의 일본 이주가 시작된 것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의 일인데, 특히 뉴커머 인구가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의 일이다. 특히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 이후 한류 붐이 일어나면서 오사카와 도쿄 등지의 코리아타운은 호황을 맞게 되었다. 재일 교포는 오늘날까지도 일본 사회에서 유무형적인 사회적 차별을 받고 있지만, 불리한 환경과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다.
다인종 사회인 미국에서 재미 한인은 다른 소수 민족에 비해 짧은 이주의 역사에도 빠른 속도로 미국 사회에 정착하여 모범적인 중산층 소수 민족이 되었다. 2021년 현재 미국에는 263만여 명의 한인이 미국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데, 로스앤젤레스(LA),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휴스턴 등 대도시 지역에는 10만~50만 명에 이르는 많은 인구가 집중해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미국 서부 지역 거주 인구가 미국 내 전체 한인 인구의 40%를 넘는다. 미국 전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인 밀집 지역인 LA 한인타운은 영어를 전혀 모르는 한국인들도 거주하기에 별다른 불편함을 못 느낄 정도이기에 ‘미국 속 한국’, ‘대한민국 나성시(羅城市)’, ‘서울특별시 나성구’ 등의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재미 교포의 역사는 1903년 하와이에 도착한 노동 이민자들로부터 시작되는데, 한인 노무자들이 모여 살았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이나 캘리포니아 오렌지 농장 일대는 일제하 해외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미국으로 본격적인 이민이 시작되는 것은 1965년 미국이 새 이민법을 발표하고 한국인 2만 명의 이주를 허가한 이후부터다. 이들은 대부분 고학력, 중산층 출신의 ‘엘리트 이민’이었으나, 교수, 연구원, 의사 등 극히 일부 직종을 제외하면 대부분 미국 사회의 척박한 환경에서 출발해야 했다. 한인들은 대부분 가족 단위로 자영업을 운영하여 작은 가게, 잡화점, 야채 가게, 생선 가게, 식품점, 음식점, 세탁소, 주유소 등을 경영했으며, 이런 소규모 사업의 성공을 바탕으로 식당, 봉제 공장, 모텔을 소유하면서 재산 규모를 늘려갔다.
재미 한인 사회는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1937년 소련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와 더불어 해외동포가 겪은 3대 비극으로 일컬어지는 1992년 4·29 LA흑인 폭동 이후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한인들의 경제력과 정치력이 신장되어 코리아타운과 다운타운 일대에 한국계 초국적 기업의 부동산 투자가 크게 늘어났으며, 성공한 한인들 중 상당수가 LA 교외지역 고급 주택지로 주거를 이전하기도 했다. 4·29 이후 많은 한인들이 LA 한인타운 바깥으로 거주지를 이전하면서 이곳에는 멕시코 등 중남미에서 이주해온 ‘라티노(Latino)’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한인들이 사업주가 되면서 피고용 노동자인 라티노들과의 사회 경제적 격차 문제가 새로운 사회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다인종 사회 미국에서 재미 한인은 상대적으로 짧은 이민사에도 성공한 모범적 소수 민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최근 한류 붐과 더불어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더욱 높아지는 추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