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성 배경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상해 거주 한인교포들이 한교(韓僑)전체대회를 개최한 뒤 1931년 10월 1일자로 해외 동포들에게 공함을 보내 한국 독립을 위해 혁명역량을 집중하고 우방의 혁명동지들과 연합전선을 전개할 것을 요구한 데서 비롯하였다.
이에 호응한 중가주한인공동회 대표 김정진(일명 김호)과 오충국은 3개의 결의안을 만들어 동년 10월 17일자로 북미의 대한인국민회에 재미한인들의 연합을 제의하였다. 이 때 나온 3개조 결의안은 ① 상해한교전체대회의 결정에 호응해 임시정부를 후원하며, ② 후원금을 수합해 임시정부로 보내며, ③ 재미한인의 총역량을 집중해 재미한교연합회를 조직·발기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제의에 대해 대한인국민회를 비롯한 미주한인단체들이 적극 호응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12월 5일부터 7일까지 “임시정부로 집중하자.”라는 표어를 내걸고 대한인국민회·나성(L.A)한인공동회·중가주한인공동회·묵경자성단이 모여 연합회 조직을 위한 대강(大綱)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12월 7일자로 선언서와 규칙 및 결의안 그리고 연합회 임원진을 구성함으로써 미주한인연합회가 공식적으로 발족되었다.
이 단체는 각 단체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사무를 건의·결의하는 입법부를 샌프란시스코에 두었다. 그리고 결의된 사항을 각 부서를 통해 집행하는 집행부를 로스엔젤레스에 각각 두었다. 입법부 대표회의 의장은 홍언이 맡았고 집행부는 사무장 송헌주, 재무 백일규·김정진, 서기 한재명, 선전부장 임정구로 구성되었다.
이 단체는 1932년 1월 22일자로 상해임시정부의 인준을 받아 이후 임정의 공식기관으로 활동하였다. 이에 따라 활동 방향을 임시정부 후원과 지지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전체 수입 재정의 전부를 임정으로 송금하기로 했는데 그 결과 결성 후 1년간의 송금 성적을 보면 인구세로 거둔 677달러 중 675달러를 송금하였다. 이 단체는 1933년 2월 나성동지회의 가입함으로써 외견상 북미 지역 한인 사회를 총괄하는 기관으로 성장하였다.
그렇지만 연합회는 소속 회원 단체에 대해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치가 없었다. 이에 따라 연합회 조직은 그 동안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대한인국민회가 1933년 4월 2일 김규식의 방미(訪美)를 계기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가입을 명분으로 연합회 탈퇴를 공식 선언하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같은 해 4월 16일 중가주(Central California : 중부 캘리포니아) 리들리(Reedley)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제외한 4개 단체 대표가 모여 특별대표회를 개최하였으나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도리어 중가주한인공동회와 나성한인공동회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가입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을 설립하면서 사실상 연합회 조직은 와해되고 말았다.
미주한인연합회는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유지되어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북미 지역 한인 사회에 불어 닥친 대동단결을 위한 통일운동 노력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단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