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담양(潭陽). 자는 사룡(士龍), 호는 자천(紫泉). 홍주 영장(營將) 전시원(田始元)의 맏아들이다.
1717년(숙종 43) 24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내외직을 두루 거쳤다. 함경도의 정평부사로 있을 때 농업을 권장하고 흉년을 당하여 이재민과 질병을 앓는 사람을 잘 보호하여 왕의 특별한 포상을 받았고, 또 강원도 춘천에 재임중에는 삼공(蔘貢)의 민폐를 통감하고 관비의 절약보조로 보삼고(補蔘庫)를 설치하여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고, 해이된 무비(武備)를 정비하고 연무청(鍊武廳)을 신축하여 장병을 훈련하여 유사시에 만전을 기하기도 하였다.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이원익(李元翼)의 『거관승묵(居官繩墨)』 1편을 손수 써서 책상머리에 두고 항상 읽고 외우며 공무에 전심하였기 때문에 처결에 잘못이 없고 관찰과 판단이 공정하였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1740년(영조 16) 전라좌수사로 있을 때에 수군의 특수함정인 해골선(海鶻船)을 건조한 것이다.
『영조실록』에 “전라좌수사 전운상이 해골선을 지었는데, 몸체가 작고, 가볍고 빨라서 바람을 두려워할 염려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해골선은 조선 후기에 등장한 주목할만한 군선이었다.
1746년 경상병사로 있으면서 독륜전차(獨輪戰車)라는 독특한 육전(陸戰)의 전구(戰具)도 제작하여 유사시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