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영변 출신. 백백교는 인천교(人天敎)와 더불어 백도교(白道敎)의 분파이다. 백도교는 전해룡의 아버지인 전정운(全廷芸 또는 전정예全廷藝)이 1912년 강원도 금화군 근동면 수태리 오성산(五聖山)에서 창교한 동학계 신종교로서 전성기에는 신도수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백도교의 교단은 비밀결사의 형태로 조직되었으며, 포교도 비밀리에 행하는 은도(隱道)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정운이 죽자 교리가 변화되고 포교방식도 공개되면서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경성의 이희룡(李禧龍)파와 경기도 가평의 차병간(車秉幹)파로 갈라졌다. 1923년 이희룡파는 인천교를, 차병간파는 백백교를 창립하였다.
백백교의 초대 교주는 차병간이었으나 형식적이었을 뿐 실제 전해룡이 권한을 행사하였으며, 얼마 안되어 스스로 교주가 되었다. 그러나 1924년 교단 간부들 사이에 사기사건이 발생하여 교세가 위축되었으며, 1세 교주인 전정운이 첩을 살해한 사실이 1930년 신문지상에 폭로되어 세인의 비난을 받게 되자 더욱 교세가 약화되었다.
전해룡은 교주가 되면서 스스로 대원님을 자칭하고 경성의 사쿠라이정[櫻井町]에 본부를 두었다. 김두선(金斗善) 등 10가지의 다른 이름을 사용하면서 신도들의 재산을 빼앗고 여신도를 변태적 방법으로 간음하는 등 횡포를 자행하였다고 비난받았다. 또한, 교에서 탈퇴하거나 배반할 기미가 보이는 100여 명의 신도들을 참살하거나 생매장하였다는 혐의를 받았다.
1937년 첩의 오빠인 유곤룡(柳崑龍)의 고발로 이경득(李敬得)·문봉조(文奉朝) 등 간부가 체포되자 도망다니다가 양평의 도일봉(道一峰)에서 자살하였다. 그의 두개골은 범죄형 두뇌의 본보기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