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 후 국내외의 급격한 정세변화에 대처하기 위하여 종래의 국가기구를 개편하여 1880년 음력 12월(1881년 양력 1월)에 만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은 12사(司)를 두어 사무를 분담, 관장하도록 하였는데 그 뒤 3차례에 걸쳐 개편을 보았다.
먼저 1882년 음력 11월 통리기무아문은 통리아문(統理衙門)과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으로 분화되었다가, 그 해 음력 12월 다시 통리아문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개칭하고, 통리내무아문을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바꾸었다.
이때 통리군국사무아문에 이용(理用)·군무(軍務)·감공(監工)·전선(典選)·농상(農桑)·장내(掌內)·농상(農商)의 7사를 두어 군국의 기무를 비롯하여 내정일체를 관장하게 하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는 정각·장교(掌交)·부교(富敎)·우정(郵程)의 4사를 분치하여 외교통상 관계사무를 맡도록 하였다.
이 가운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督辦)은 민영목(閔泳穆)이 맡았고, 그 아래 설치된 정각사의 협판(協辦)에는 묄렌도르프(Mollendorff, P.G.von), 참의(參議)에는 변원규(卞元圭), 주사(主事)에는 정헌시(鄭憲時)가 임명되었다.
이 양 아문의 설치를 통하여 개화파들이 대거 정치적 진출을 꾀하였다. 양 아문은 다시 1884년 음력 10월 통리군국사무아문을 의정부에 통합시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만이 남았다가 이것이 다시 기구가 축소된 채 그 뒤 통리아문으로 갑오개혁 때까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