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치중(致中), 호는 용산(蓉山). 본관은 동래(東萊). 정동우(鄭東愚)의 증손으로, 정문용(鄭文容)의 손자이고, 정기일(鄭基一)의 아들이며, 김노검(金魯儉)의 외손자이다.
26세 되던 1848년(헌종 14) 5월 경과증광별시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등제하였다. 이듬해 한권(翰圈)을 거쳐 1851년(철종 2)에 규장각직각이 되었고, 1855년에는 병조정랑을 거쳤다. 그 해 8월 간삭지전(刊削之典)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57년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1860년에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대거승지(對擧承旨)를 거쳐 1863년(철종 14) 전라감사에 재임하였으며, 1865년(고종 2)에 이조참판이 되었고, 1866년 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같은 해 9월부터는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고 1870년에는 예조참판, 1871년 1월에는 공조판서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그 해 10월에는 재차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73년 7월에는 사은 겸 동지정사(謝恩兼冬至正使)에 임명되어 부사 홍원식(洪遠植), 서장관 이호익(李鎬翼), 수행원 강위(姜瑋) 등과 함께 청국에 다녀왔다. 1874년 9월에는 한성부판윤을 거쳐 이듬해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76년 9월에는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형조판서·사헌부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880년 대사헌에서 다시 형조판서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1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된 뒤 다시 사헌부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