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중립(中立). 조선 초기의 대학자인 정여창(鄭汝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호조정랑 정희설(鄭希卨)이고, 아버지는 정언남(鄭彦男)이며, 어머니는 김중홍(金重泓)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약관 때는 사서오경을 비롯, 제자백가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 성리학이 의리론 위주로 변해감을 염려하여 실천 위주의 학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1575년(선조 8) 25세의 나이로 향천(鄕薦)에 의하여 동부참봉(東部參奉)에 기용되었다.
이 후 영숭전(永崇殿)·문소전(文昭殿)·집경전(集慶殿)의 참봉을 거쳐, 군자감봉사·직장·주부·감찰·장례원사평 등을 역임하였다. 1586년 운봉현감, 1591년 곡성현감, 1594년에는 장수현감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한편, 1597년 정유재란 때 집에서 노부모를 봉양하고 있었는데, 왜군이 재침하였다는 급보를 듣고 노부모와 가솔을 거느리고 황석산성(黃石山城)으로 피신하였다. 그 뒤 왜군의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어 양친이 모두 적에게 살해되자 시신을 찾아가지고 향리로 돌아와서 선영 아래 장사지내고 여막을 친 뒤 시묘하였다.
사람들이 잠시만 피해서 적이 물러간 뒤에 효도를 다해도 늦지 않다고 권하였으나 듣지 아니하고, 죽지 못해서 부모의 시신 옆에 있는 것도 죄가 되는데 자기 몸의 안전을 위하여 피신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울었다. 그러고는 더욱 묘를 수호하면서 겨울이 지나도 떠나지 아니하였다.
이듬해 왜군이 몰래 숨어들어와서 살해하고 말았다. 뒤에 나라에서는 그 효성을 표창하여 정려의 은전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