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명 마르코. 서울 출신. 서당훈도로 생업을 이어오던 중,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때 앵베르(Imbert, L. M. J.)주교와 선교사들이 조금도 두려운 빛 없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감동하여 그 뒤로부터 천주교교리를 배워 열성적인 신자가 되었다.
1845년 페레올(Ferreol, J. J. J.) 주교가 입국하자 회장으로 임명되어 20여 년간 열성적으로 교회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1854년에 시작된 성영회 사업이 베르뇌(Berneux, S. F.) 주교 때에 본격화 되자, 이를 맡아 고아 구제 사업을 관리하였다.
1866년(고종 3) 10월 병인박해가 일어나 베르뇌(Berneux, S. F.)주교가 체포되고, 이어 주교의 하인이던 이선이(李先伊)의 고발에 의하여 자신도 체포되어 3월 11일 푸르티에(Pourtie, J. A.)신부 등과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으로 순교하였다. 1968년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