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원흠(元欽)·이용현(李用賢). 호는 쌍공(雙空). 평안북도 의주 출신. 1922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통의부(大韓通義府)에 입단, 사령장(司令長) 신팔균(申八均) 부관, 제5중대장으로 항일독립전쟁에 참전하였다.
만주에 있는 친일단체를 습격, 파괴하고 친일파를 숙청하는 한편,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24년 대한통의부·광정단(匡正團)·의성단(義成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등의 단체가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자, 이에 참여하여 사령부관(司令副官)과 제1중대장에 임명되어 독립전쟁 일선에서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5년 3월 제5중대장 김석하(金錫夏)와 합동으로 국내 진입작전을 수행하였다. 부대를 3개대로 나누어 제1대는 평안북도 초산군 추동주재소를, 제2대는 단일주재소를, 제3대는 여해주재소를 기습, 공격하였다. 그 결과 독립군은 수 명의 일본경찰을 사살하고 주재소 건물을 소각시켰으며 다량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26년 독립운동을 더욱 조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핵심단체를 결성해야 된다고 통감한 재만 민족지도자들이 길림의 양기탁(梁起鐸)집에서 각계 각층을 망라한 연석회의를 개최되자 정의부 대표로 참가하였다.
회의 결과 1926년 4월 5일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이 결성되었다. 당은 정당원과 준당원을 합쳐 모두 1,500여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때 위원으로 선임되어 단체를 이끌어나갔다.
1927년 3월 11일 이동구(李東求)·이원주(李元柱)·유공삼(柳公三)·방찬문(方贊汶)·이한봉(李漢鳳)·박기돈(朴基敦) 등과 군자금 모금을 위해 장춘(長春)에 거주하는 황도종(黃道宗)을 방문하려고 가던 중 하얼빈에서 일제 경찰에 잡혔다.
1928년 3월 19일 신의주지방법원 공판에서 사형, 4월 20일 언도공판에서 무기 징역을 구형 받았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평양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었다. 광복이 되면서 19년간의 옥고에서 풀려났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