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온양(溫陽). 정석호(鄭錫好)의 아들로 정태호(鄭泰好)에게 입양되었다.
1887년(고종 24) 유학(幼學)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9년 장령으로서 이조전관(吏曹銓官)의 인사 불공평을 전 이조판서 조병세(趙秉世)와 참판 김종한(金宗漢)이 책임지고 처벌받을 것을 주장하는 양사의 연차(聯箚)에 참여하였다.
그 뒤 부수찬·규장각직각·교리 등을 거쳐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고, 1891년 식년감시(式年監試)의 시관이 되었다. 1897년 배종비서승(陪從秘書丞)으로 민비의 인산(因山)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중추원 1등의관에 임명되고 칙임관 4등이 되었다. 이어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가 1900년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실정으로 말미암아 면직되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듬해 특사조칙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영선사장(營繕司長), 봉상사(奉常司)의 장과 제조를 지냈다. 1904년 국가의 부강은 농·공·상 3자를 힘쓰는 데 있으며, 그 가운데 농업을 최우선으로 개발하여야 하고, 그 방법으로 열국의 새로운 이기(利器)를 취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또한, 이를 위하여 황실에 속하는 한 원(院)을 설치하여야 하므로 궁내부로 하여금 장정을 만들고 빨리 시행하도록 하자고 하여 고종은 궁내부에 품의토록 하였다. 그 뒤 어공원부경(御供院副卿)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