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일(迎日). 일명 순기(純基). 자는 사홍(士弘), 호는 검와(檢窩). 경상북도 영일 출신. 영천의병장 정환직(鄭煥直)의 재종질이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밀명을 받은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鄭鏞基)에게 거의할 것을 명하였다.
이 때 정진한은 정용기·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 등과 함께 거의 계획을 세우고, 이규필(李圭弼)·백남신(白南信)·정완성(鄭完成)·최기보(崔基輔)·최치환(崔致煥)·정진학(鄭鎭鶴)·정대하(丁大廈)·이창송(李蒼松) 등을 인근의 여러 지방으로 파견하며 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
그 결과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되어 정용기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소모장(召募將)을 맡아 군사를 모집하고 군수품을 확보하는 등의 임무를 띠고 활약하였다. 그런데 1906년 4월 28일 의진이 청하읍으로 진격하던 중, 경주진위대 참령 신석호(申錫鎬)의 계략에 빠져, 대장 정용기 이하 여러 동지들이 붙잡혀 대구로 압송되었다. 이때 옥중의 정용기와 만나면서 옥중의 동정을 탐지하여 의진에 알렸다.
그 뒤 1907년 4월부터 산남의진은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8월 영천 자양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뒤, 청하·흥해·군위 등지를 전전하며 도처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이어 같은 해 9월 정용기가 순국하자 정환직을 다시 대장으로 추대하고, 청하·영양·영해·일월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같은 해 11월 정환직마저 순국하자, 최세한(崔世翰)·이세기(李世紀) 등과 함께 의병항전을 계속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접전 중 일본군에 붙잡혀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10년 경술국치 때 특별 사면되었다.
1982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