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순조 1) 신유박해로 살아남은 천주교인들은 산간벽지로 흩어져 새로운 교우촌을 이루고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유사옥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전국에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은 천주교 탄압의 법적 근거가 되어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천주교인들은 이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정하상(丁夏祥) 등을 중심으로 교회재건과 성직자 영입운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1827년 2월 곡성의 한 교인촌에서 사소한 다툼이 일어나 곡성현감에게 천주교도를 고발하는 밀고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다시 전개되었다.
곡성에서 시작된 천주교인 검거선풍은 점차 전라도 전역으로 파급되어 240여 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이어 4월 22일 전주의 포졸들이 상주에서 신태보(愼太甫)를 체포하여 전주로 압송해가자, 경상도에서도 천주교인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일어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서울에서는 4월에 이경언(李景彦)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고, 충청도 단양에서는 경상도에서 박해를 피하여 유성태(劉性泰) 집에 숨어 있던 신자들이 체포되어 충주로 압송되었다.
이렇게 하여 전라도ㆍ경상도ㆍ서울ㆍ충청도 등지에서 2∼5월의 4개월 동안 500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유배되었고, 알려진 순교자는 많지 않다. 전주에서는 이경언이, 대구에서는 박경화와 김세박(1828)이 순교했고, 1827년에 체포되었던 김대권, 신태보, 이태권, 이일언, 정태봉 등 5명은 전주 옥에, 김사건, 박사의, 이재행 등 3명은 대구 옥에 갇혀 있다가 1839년에 처형되었다.
이 옥사로 전라도지방의 천주교회는 거의 괴멸상태가 되었는데, 정해박해 때 체포된 순교자들은 대부분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