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남(河南), 자는 명신(命新), 호는 미산(微山). 아버지는 정동우(鄭東祐)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 이호일(李浩一)의 딸이다.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정훈(庭訓)으로 과거공부에 열중하였으나 뜻을 바꾸어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본받아 『가학연의(家學演義)』를 편찬하고 수신의 지침서로 활용하였으며, 1860년 부친의 명으로 화림사(花林寺)·법화사(法華寺)를 찾아 경학과 예학에 정진하였다.
1862년 지리산 백무동(白霧洞)에 들어가 초가집을 짓고, 위기(爲己)의 학문에 침잠하였는데 이 때 군수 한치조(韓致肇)가 흥학(興學)의 책임을 부탁하자 본격적으로 후학 지도에 정열을 쏟았다. 1868년 기정진(奇正鎭)을 찾아 칠정(七情)에 대해 논변하였으며, 1872년 임헌회를 찾아 사제 간의 의리를 맺고 사도(思道)란 호를 받고 돌아와 『대명충의록(大明忠義錄)』을 편찬하였다.
1879년 부친과 모친상을 당하여 6년간을 지극한 효성으로 마쳤으니 정환주가 왕래했던 성묘(省墓)길을 효자로(孝子路)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 후 정환주는 세상에 뜻을 잃고 숨어 살면서 백이(伯夷)와 도연명(陶淵明)의 지취를 누렸으며, 죽을 순간까지 찾아오는 빈객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정환주는 『소학(小學)』·『중용(中庸)』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이기설(理氣說)·사칠논변(四七論辨)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다. 정환주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권기덕(權基德)·강민영(姜敏永)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미산유고(薇山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