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백거(伯據), 호는 흠재(欽齋). 아버지는 조석휴(曺錫休), 어머니는 탐진송씨(耽津宋氏) 송기순(宋基舜)의 딸이다. 어려서 조부 조의곤(曺毅坤)으로부터 학문을 시작하였고, 21세 때는 조부의 유명에 따라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7년 청성 가거리(靑城嘉苣里)로 최익현(崔益鉉)을 찾아가 조부의 묘갈명을 청하였으며, 1899년에는 『노사집(蘆沙集)』 발간에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에 『동오유고(東塢遺稿)』를 편집하기도 하였다.
최익현·기우만의 의거(義擧)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1906년 최익현의 순국과 1916년 기우만의 상을 당하자 향리의 문생들과 채약이동이계(採藥二同二契)를 맺어 선생의 상장(喪葬) 및 유집 간행에 힘썼다. 1909년 동향인으로 천민 출신인 의사(義士) 박도경(朴道京)이 순국하자 박도경의 명정(銘旌)을 쓰기도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강학(講學)과 농사를 지으며 부모 봉양에 힘썼다. 조덕승은 사서(四書)의 훈고학적인 연구와 당시 학계에서 논란거리였던 명덕(明德)의 주리(主理)·주기(主氣)에 있어서 겸이기설(兼理氣說)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 정홍채(鄭泓采)가 있으며, 저서로 『흠재문고(欽齋文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