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정주출신. 1906년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907년 세례를 받았다. 1911년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9월 제5회 독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 무렵 일제는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세력의 탄압에 나섰는데, 이것이 이른바 105인 사건이다.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 암살음모의 구실로 해서지방의 유수한 교회관계 인사들이 체포됨에 따라, 1911년 11월 선우 혁·이명룡·이승훈 등 다른 정주 출신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붙잡혀 옥고를 치르다가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풀려났으며, 재판정에서 고문당한 사실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1916년 청정교회에서 시무하였고, 1922년에는 북만주에 선교사로서 나간 적도 있다. 1924년 용천군 신서교회(新西敎會), 1935년 덕봉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만년에는 벽지교회를 돕는 일도 하였다. 6·25전쟁 중에 월남하지 못한 채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