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군필(君必). 조철하(趙徹夏)의 아들이다.
1874년(고종 11) 유학(幼學)으로서 증광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승정원의 주서가 되었다. 1876년 옥당(玉堂)에서 탐학한 황해도관찰사 정태호(鄭泰好)의 처벌을 요구하는 연명으로 된 차자(箚子)를 올렸을 때 부수찬으로 참여하였다.
부교리를 거쳐 1878년 헌납으로 강로(姜㳣)와 한계원(韓啓源)을 처벌하자는 양사(兩司)의 연차에 참가하였고, 1883년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887년에는 안변부사로 덕릉(德陵)·안릉(安陵)·지릉(智陵)의 개수에 참여하여 포상, 가자(加資)되었다. 이듬해 고산역(高山驛)에서 민란이 발생하자 전 안핵사 정광연(鄭光淵)을 대신하여 안핵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주모자들을 처단하지 않고 특별히 석방함으로써 의정부에서 문초를 당하였다. 1889년 풍선군(豐善君)으로 영의정 심순택(沈舜澤) 등과 함께 거국대동(擧國大同)의 논의를 청하였고, 1891년 진하사(進賀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893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1897년에 칙임관4등이 주어졌다. 그뒤 사직서(社稷署)·종묘서(宗廟署)·영희전(永禧殿)의 제조 등 궁내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왕실의 의례를 주로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