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자복(子服), 호는 근수헌(近水軒). 아버지는 예조참판 조희일(趙希逸)이며, 어머니는 정흠(鄭欽)의 딸이다.
광해군 때 유배되었던 아버지를 따라 배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613년(광해군 5) 폐모론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하고 있다가,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니 그의 할아버지·아버지와 함께 3대에 걸쳐 진사시에서 1등하는 가문이 되었다.
일찍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시직(侍直)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사직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후에도 시직·부수(副率) 등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머물면서 스스로 당호를 ‘근수헌’이라 하고 그가 지은 시편을 모아 간행하는 등 학문에 정진하였다. 당시(唐詩)와 진체(晉體)에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