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권회복단은 단군(檀君)을 받들고 신명을 바쳐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것과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족지도자와 연결,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915년 1월 15일 대구광역시 달성군 수성면 안일암(安逸庵)에서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 등이 시회(詩會)를 연다고 가장하고, 경북지방의 유림들을 포섭, 항일운동결사를 조직하였다.
조직은 통령(統領)에 윤상태, 외교부장에 서상일, 교통부장에 이시영·박영모(朴永模), 기밀부장에 홍주일(洪宙一), 문서부장에 이영국(李永局)·서병룡(徐丙龍), 권유부장에 김규(金圭), 유세부장에 정순영(鄭舜永), 결사부장에 황병기(黃炳基) 등으로 구성되었다.
활동을 국외로 확대시키기 위해 윤창기(尹昌基)·이시영·서상일·박영모 등을 만주와 연해주로 파견,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족지도자와 연락하도록 계획하였는데, 3·1운동이 일어나면서 중단되었다.
그런데 1910년대 국내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중 3·1운동까지 발각되지 않은 몇몇 단체 중의 하나였다.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지방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4월 3일 창원만세운동에서 1,000명의 군중을 동원, 일본군경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각 지방에서 모은 독립운동자금을 송금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림단(儒林團)이 전개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 작성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단원 장석영과 우하교가 연서하였고, 김응섭과 조긍섭은 독립청원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였다. 이를 김응섭과 남형우가 상하이로 가져갔다.
그러나 단원의 밀고로 관련인물 28명 중에 13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이 조선국권회복단중앙총부사건(일명 대구28인사건)이다. 1919년 6월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심리되었다.